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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 소년의 레시피로 생각하기 쉬운 책이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면 그 레시피가 그냥 평범한 레시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 책의 특징이자 매력이다. 고등학생 제규가 어느 날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좀 특이한 제규의 가정환경이 제규가 요리를 하게 만든 배경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뭐 나의 추측뿐이다. 제규의 엄마(이 책의 저자)는 요리를 못 해서 결혼하고 남편이 해주는 밥을 먹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 대신 고등학생 아들이 해주는 밥을 먹게 됐다. 엄마야 뭐, 누가 해주든 본인이 못하는 밥을 해주는데 뭐라고 할 말이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흔히 생각하기에 고등학생이 해야 할 일인가 싶을 거다. 제규는 야간 자율학습도 안 한다. 그저 학교 정규 수업만 듣고 온다. 그런 아들의 하굣길 손에는 이런저런 식재료가 가득한 장바구니가 들려 있다. 책 표지 그대로를 연상해 보면 쉽게 된다. 그렇게 장바구니를 손에 든 게 소년의 부모가 아니라 소년이라는 점에서 좀 아이러니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책은 그런 제규의 일상과 제규가 만든 요리의 레시피가 채워졌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고등학생 소년의 요리 이야기라고 보면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조금 더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 이야기다. 생각해 봐라. 세상 어느 부모가 고등학생 자녀에게 저녁 자율학습도 빠지고 집에 돌아와 저녁상을 차리는 걸 가만히 두고만 보겠는가. 그런데 좀 다른 방식의 육아를 하는 부모님 때문일까. 제규는 가능했다.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 아들을 믿고 지지해주는 부모님이 있기에 할 수 있었다. 제규도 처음부터 요리를 잘했던 건 아니다. 어느 날 시도해본 요리의 시행착오 역시 대단했다. 처음 하는 음식들이 어떻게 처음부터 완벽한 요리로 태어날 수 있었겠는가. 제규가 미각 천재 장금이도 아닌데... 제규가 만드는 음식들은 가족들의 시식을 통해, 제규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면서 발전했다. 특히 제규의 일상을 많이 들여다보게 되는데, 어차피 이 책의 저자인 엄마의 시선에서 서술하는 글이니 제규의 마음을 100% 다 반영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간섭과 억압, 다그침으로 부모의 뜻대로 나아가길 바라는 아이로 보는 게 아니라, 제규를 온전히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려고 애쓰는 부모의 모습이 보인다. 부모의 지시가 없었다. 대화를 통해 그들의 의견을 나누고, 성급함이 없이 지켜봐 주는 태도가 계속된다. 그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제규의 부모가 이렇게 보여주고 있으니 가능한 일이라는 게 증명된 셈이다. 요리하는 소년의 모습을 연상하고 이 책을 펼친 독자가 많을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그런 예상을 하고 읽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소년 제규의 요리책이자 성장기를 그대로 기록한 것만 같다. 제규가 요리를 한다고 해서 요리 만 하는 건 아니었다는 거다. 우리가 아는, 우리가 상상하는 열일곱 소년의 일상이 그대로 담겨 있다. 열 살 차이 나는 유치원생 동생과 싸우기도 하는, 아직은 어른이 아닌 소년이었다. 종일 게임 삼매경에 빠지기도 하고, 요리를 하겠다면서 가끔 요리를 하는 요리사다. 방학을 시작하니 생활 패턴이 달라지면서 늘어지게 잠을 자기도 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피시방을 드나드는,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열일곱 소년의 모습이었다. 그러니 뭔가 대단한 선입견을 품고 제규를 보려고 했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뭐야? 요리하는 소년이라면서? 왜 요리는 안 하고 딴짓하는 거지? 뭐 이런 식의 실망을 토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말은 넣어두자.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책은 요리책이 아니라, 요리하는 소년의 성장기라고 봐야 맞는 거니까.언젠가 우리나라의 교육이 마음에 안 든다고, 아프리카 초원에서 아이를 뛰어놀게 하면서 키우겠다고 말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도 어김없이 아이를 우리나라의 교육 시스템에 깊숙이 파고들게 키우고 있다. 그 친구 스스로 열성 엄마의 자리를 버리지 못하는 걸 보면,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자유로운 육아나 공부는 절대 쉽지 않은 것 같다. 저자와 같은 부모가 되는 길 역시 너무 어려울 것 같은데, 저자는 또 그걸 해낸다. 요리하는 제규의 모습을 보면서 결코 제규 당사자만의 마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는 걸 계속 생각하게 된다. 마음가짐, 마음의 변화, 의지 같은 것이 어우러져서 제규의 요리를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부모나 제규의 이모나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또 다른 가족들의 시선은 어때야 하는지, 또 정규 수업 후에 하교하는 제규를 허락한 담임선생님의 마음은 무엇인지, 제규 자신이 품은 의지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누구 한 사람 어긋난 시선으로 봤다면 지금의 제규는 요리가 아니라 늦은 밤 어느 길에서 방황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기 싫은 공부를 붙잡고 있는 것보다 하고 싶은 일을 향한 열정이 더 가득한 소년. 또래의 아이들이나 다른 부모가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겠지만, 아직 뭘 모르는 어설픈 어른의 눈으로 보는 나는, 제규와 제규의 부모가 마냥 부럽다. 적어도 제규와 제규의 부모가 선택한 지금의 시간이 후회로 남지는 않을 테니...많은 어른이, 청소년이 같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소설이 아니라, 실제의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 신뢰도 있다. 누구나 각자의 선택을 향해 가야겠지만, 적어도 후회하지 않는 길을 가려고 노력하는 건 똑같을 것이기에.
미래는 불안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 써야 할 시간과 돈도 저축한다. 하고 싶은 일은 나중으로 미루는 게 인생이라고 가르친다. 고등학생이 된 제규는 스스로 궤도이탈자가 되었다. 본 적 없는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해야 할’ 학교공부 대신에 ‘하고 싶은’ 요리를 했다. 뭔가가 되지 않았어도, 그 과정은 근사했다. 밥 짓는 소년을 글로 쓴 이유다.
_프롤로그 중

나는 제규에게 박찬일 셰프의 칼럼을 읽게 했다. ‘요리사의 평균 급여는 바닥. 노동시간은 불법 체류하는 외국인 노동자보다 더 길고, 신분 보장도 잘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제규도 ‘요리사의 근속 연수가 3년 미만인 이유가 창업한 식당의 생존기간이 대개 3년을 넘기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중략)
엄마, 난 대학 안 가요. 학자금 대출받아서 처참하게 살 것 같애.
너 학원 안 보내고 모아놓은 돈 있어. 등록금 내라고 줄 거야.
싫어요. 학교 공부 자체가 나랑 안 맞아. 내가 왜 ‘최저임금으로 한 달 살기’라는 기사를 관심 있게 읽은 줄 아세요? 남 얘기가 아니니까. 내가 그렇게 살 수도 있잖아요.

순간, 코끝이 아렸다. 오찬호의 책 진격의 대학교 에는 ‘대학생=대기업 입사 희망자’라는 공식이 나온다. 남편과 나는 드라마 을 보면서 우리, 회사 안 다니길 잘했다. 애들도 보내지 말자 고 다짐하는 바보들. 이런 부모를 둔 제규는 테이블 서너 개짜리 식당을 하는 게 꿈이다. 의젓하게 돈 욕심 없어요 라고 말하지만 아직도 잘 때는 이불 덮어달라고, 뽀뽀해달라고 한다.

제규는 더 이상 자퇴할래요 라고 조르지 않는다. ‘밥 걱정의 노예’인 남편은 아들이 밥 하니까 좋네 라면서 며칠간 출장을 갔다. 우리 집의 진짜 주방장 노릇을 하게 된 제규는 학교에 갔다 와서 밥상을 차렸다. 먹고 치우고, 좋아하는 셰프의 동영상을 찾아보다가 학교에서 내준 과학 숙제 걱정을 했다. 나는 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
만둔대 의 한 구절을 읽어줬다.

이 교실 외에도 지금 칠판 앞 수백 개의 등짝에 수백 종류의 미래가 걸려 있고, 그렇기에 수백 종류의 길이 펼쳐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고등학교란 곳은 왠지 낙원 같다.
엄마, 그거 진짜 아니에요. 고등학교가 낙원 같다고요?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냥 참고 다니는 거라고요.

반박 불가! 제규 말은 책 속의 글보다 더 현실적이었다. 인내하면서, 정해진 몇 가지의 길로만 가는 게 우리나라의 고등학교다. 수백 종류의 길을 탐구하는 건 쓸모없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 부부는, 제규가 다른 길도 가봤으면 좋겠다. 모든 감각이 활짝 열려 있는 또래 친구들과 같이 많이 웃고, 때로 실망도 하면서. 그러려면 학교는 계속 다니는 게 좋겠다.
_ 중


아, 정곡을 찔렸다. 내가 제규를 잘 모르고 있다고 확실하게 알게 된 때는 꽃차남을 낳고 나서다. 열한 살에 동생을 본 제규는 엄마! 아빠랑 나랑 셋이서만 살자 며 서럽게 울었다. 나는 아이의 상실감을 감싸주지 못했다. 그 상태로 제규는 사춘기를 맞았다. 방문을 쾅쾅 닫고, 가끔은 괴성도 질렀다. 나도 아기 키우는 거 힘들고 밥벌이도 고되다고 같이 짜증을 냈다.

시간은 우리 사이를 천천히 회복시켜주고 있다. 불도 제대로 안 켜진 사춘기의 터널을 통과한 제규의 표정은 순해졌다. 부러질 것처럼 딱딱하던 말투도 다정해졌다. 자기가 한 음식을 식구들이 맛있게 먹을 때마다, 제규는 뭐라도 크게 이룬 사람처럼 흐뭇해한다. 우리는 그저 마주앉아 밥을 먹고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할 뿐인데, 서로를 알아가는 느낌이 든다.
_ 중

아버지는 우리한테 음식만 남겨준 게 아니다. 아내를 아끼고, 새끼들을 예뻐하고, 이웃과 유쾌하게 지낸 당신의 유전자도 물려주었다. 그래서 나는 결혼하고 줄곧 남편이 해주는 밥을 먹고 산다. 고등학생 아들은 스스로 아침밥을 해먹고 학교에 간다. 저녁에는 식구들 밥을 차린다. 제 할아버지처럼 친구들을 불러와 밥을 해 먹인다.
(중략)
울컥울컥 솟던 눈물이 바로 마르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같이 근사한 사람을 조선 셰프 서유구 에서 만났다. 서유구는 임원경제지 를 쓴 사람. 우리 아버지 강호병님보다 170여 년 앞서 태어났다. 그러나 명문가 출신 서유구도, 그의 할아버지도 직접 음식을 했다. 그의 할아버지가 임종을 앞뒀을 때, 서유구는 이렇게 썼다.

좋은 집안이거나 먹고살 만한 집안에는 반드시 인품이 좋거나 학식이 뛰어나거나 돈을 버는 재주를 가진 인내심과 희생정신이 강한 남다른 할아버지가 계신다. 할아버지의 덕과 수고로 생기는 혜택은 아들인 아비보다 손자가 더 많이 받게 되는데 우리 서씨 집안도 다르지 않다.
_ 중

날마다 ‘밥이나’ 하고 있는 고등학교 1학년. 재미있어 보였다. 대학입시라는 궤도에 진입하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가겠다는 모습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야자 대신 저녁밥 하는 고딩 아들’이라는 기록을 시작했다. 제규가 밥 하기 싫어졌어 라고 말 하면, 언제든지 그만둘 생각이었다.

글을 읽은 사람들이 진심을 담아서 말을 걸어왔다. 어떤 이는 요리하려면 최소 전문대는 다녀야 하고, 영어도 꼭 공부해야 한다 라는 당부를 했다. 대한민국에 실존하는 가족이 맞냐 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한 고등학생은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낸 제규가 부럽다 고도 했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얘기해줬다 는 교사도 있었다.

제규가 가는 길에는 크고 잘생긴 나무 그늘이 없다. 목을 축일 물도 스스로 챙겨서 다녀야 한다. 나는 옹달샘이라도 되어주고 싶다. 언젠가는 아이들에게 대학입시 말고도 다양한 길이 열릴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때에는, 학교공부 바깥에서 꿈을 키우던 제규 이야기는 시시해질 거다. 나는 엄마니까 낙관한다.
_에필로그 중



목차


프롤로그
궤도를 벗어난 소년이 매일 차려주는 밥상에 대해 쓰며,
무언가가 되어가는 과정의 소년은 두려움이 없다

1부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 요리를 시작했다

불가능한 꿈에서 가능한 꿈을 찾아가던 시간태어나 처음, 내 돈 주고 산 음식 블루베리 요거트

이제 막 고등학생, 야자 대신 저녁밥 한다
자퇴하고 싶은 소년의 버섯 리소토

좋아하는 일도 가끔은 지옥이 된다
기본의 어려움과 쓰라림을 알게 해주는 생채

음식은 우리를 과거로 돌아가게 만든다
태어나서 기쁜 날에는 오븐 닭구이

우리는 요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잠이 든다
성장통으로 몸이 무겁다면 수제 돈가스

요리를 하자 소중한 것이 생겼다
싸운 후 화해하고 싶을 때는 치킨 텐더

좋아하는 음식이 닮아가는 날들에 관하여
처음 차리는 생일 밥상엔 카프레제 샐러드












2부
음식은 마음을 성장하게 한다

돈가스 모르는 사람은 나를 모르는 거예요 반항기 일곱 살의 잃어버린 입맛을 되찾아주는 주니어 세트

정갈한 마음으로, 아이는 진짜 요리를 생각한다요리사 체험을 하고 싶다면 잡채

밥상은 집안의 권력을 말해준다사회생활 하고 돌아온 일곱 살에게 만들어준 새우피망전

기술이 있으면 집안을 지배한다알뜰한 요리 기술자의 토마토 스파게티 소스

진정한 자립은 다른 사람을 위해 요리할 때 시작된다아픈 엄마를 위해 아들이 끓여주는 죽

요리를 하자 자랑할 것이 생겼다꿈이 여물어가는 날엔 단단한 꼬막무침

진심으로 수련하는 자의 태도에 관하여숙취로 고생하는 아빠를 위한 해장국


3부
음식이 우리 모두를 안아준다

모두가 서로를 위해서 움직인다스트레스로 머리가 빠질 때는 굴튀김

우리 집이 곧 맛집이 된다줄 서서 먹는 맛집이 싫다면 손수 상하이 파스타

슬픔은, 맛있는 요리를 먹지 못할 때 찾아온다아프지만 강해진 엄마를 위한 콩나물밥

네가 즐겁게 먹고살았으면 좋겠다소년이라면 자고로 돈가스

좋은 아들은 대대손손 이어진다 기력이 쇠한 몸을 위해 부드러운 무쌈말이

잘 먹는 집안에는 좋은 할아버지가 있다떠나는 사람과 함께 마지막으로 먹은 탕탕이

아들이 차려주는 밥에도 애환이 있는 법돈 걱정을 할 줄 알게 되었을 때는 떡갈비






4부
그렇게 쭉, 우리는 함께 먹을 것이다

소유욕은 사라지고 요리욕이 꿈틀댄다 찬바람이 불기 전에는 생합 넣은 에스가르고

음식이 곧 약이 된다수술 다음 날에 먹는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

건강은, 행복한 요리를 먹는 데서 찾아진다여름 내내 외식 네 번, 더위를 이기게 해주는 레몬청

너의 길을 멋있게 걸어갔으면 좋겠다무엇이든 해도 되는 때, 무엇에도 먹기 좋은 오이피클

에필로그
자신의 삶을 요리하는 소년의 행복 레시피
혼자 길 떠나는 소년은 특별하지 않아도 멋있다